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르주 첼리비다케 (문단 편집) == 생애 ==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베를린 필을 지휘하면서 지휘자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정말 운이 좋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더불어 독일에 남아서 활동했던 지휘자들[* 푸르트벵글러, 카라얀, 뵘 등.]은 줄줄이 연합국에 의해 연주활동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베를린 필 단원들은 오케스트라를 재건하여 연주활동을 이어가고자 했지만 지휘할 사람이 없었다. 베를린 필은 지휘자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여 해외에 있던 발터, 셀, 라이너 등에게 간절히 도움을 청했지만 모두에게 거절당하고 말았다.[* 당시 베를린 필이 제시한 개런티는 미국 오케스트라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결국 베를린 필은 당시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던 [[레오 보르하르트]]라는 어중간한 지휘자를 간신히 영입하여 공연 활동을 이어나갔다. 당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베를린 필은 거의 매일 같이 이곳저곳에서 닥치는 대로 연주회를 소화했다. 그러나 불과 석달만에 보르하르트가 연합군의 오인 사격으로 사망하면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 베를린 필 단원 중 한 사람이 첼리비다케라는 젊은 합창지휘자를 추천했다. 첼리비다케는 아마추어 합창단 이외에는 지휘 경력이 전무했지만 베를린 필은 당장 일정에 잡힌 연주회들을 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어쨌거나 첼리비다케에게 베를린 필을 지휘할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다.[[https://youtu.be/L-tyWIvZoSY|영상 보기]] 젊은 첼리비다케의 지휘는 베를린 청중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고, 이후 1947년 5월 푸르트벵글러가 복귀할 때까지 베를린 필을 사실상 이끌게 되었다. 1947년 5월 마침내 푸르트벵글러가 베를린 필에 복귀했지만 푸르트벵글러는 건강 문제와 작곡 때문에 베를린 필과 많은 연주회를 가지지는 못했기 때문에 첼리비다케는 여전히 베를린 필을 자주 지휘하게 되었다. 하지만 첼리비다케는 단원들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았고 걸핏하면 베를린 필 단원들의 실력이 형편없어서 전부 물갈이 해야한다고 비난했기 때문에 베를린 필과 관계가 악화되었다. 푸르트벵글러도 젊은 사람(첼리비다케)이 너무 기술적 정확성에만 집착하여 베를린 필을 미국 오케스트라처럼 만들고 있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종전 직후 첼리비다케는 연간 수십회씩 베를린 필을 지휘했으나 푸르트벵글러 복귀 이후 점차 연주회 횟수가 줄어들어 1954년에는 단 네 번만 지휘했을 뿐이었다. 첼리비다케는 베를린 필이 자신과 계속 연주를 하고 싶으면 단원들을 싹 다 물갈이해야 한다고 공언하는 등 악단과 불화는 깊어졌다. 마침내 1954년말 리허설에서 단원들에게 폭언을 퍼붓고 지휘대를 떠나버렸고 이것으로 첼리비다케와 베를린 필의 관계는 잠정적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 사건이 벌어진 직후 갑자기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게 되었다. 불과 두달 후에 미국 순회 공연이라는 큰 행사를 앞두고 있던 베를린 필은 당장 새로 상임지휘자를 뽑아야 했고 선택된 이는 카라얀이었다. 이후 첼리비다케는 몇십 년 동안 베를린 필을 지휘하러 온 일이 없었고, 만년인 1992년이 되어서야 한 차례 지휘하였다. 베를린필이 카라얀을 선택한 이유가 첼리비다케보다는 카라얀이 더 상업성이 뛰어나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는 설이 도는데 사실은 첼리비다케 개인의 성격적인 문제가 컸다고 볼 수 있다. 독불장군 그 자체로 걸핏하면 리허설 현장을 전쟁터로 만들어버리는 첼리비다케의 성격을 베를린필 단원들이 참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로 굳혀지고 있다. 이후 유럽 여러 곳에서 객원 지휘자 생활을 했다. 특히 이탈리아, 스페인 등 자신과 언어적 유사성이 높은 라틴어권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루마니아어는 라틴어에서 갈라져 나오면서 각각의 언어가 분화된 기간이 짧기 때문에 유사성이 매우 높아서 서로 90% 정도 소통이 가능하다. 보통 못알아듣는 부분은 주로 근대 이후 만들어진 새로운 전문 용어들이다. 프랑스어의 경우 가장 이질적이라고 하는데 발음이 특이하게 변해서 그렇다. 그래서 프랑스어는 차라리 글로 보면 대부분 이해한다고 한다.] 1950년대 초부터 60년대 중반까지 그는 주로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다. 이 시절 밀라노, 토리노, 로마 등 각지에서 이탈리아 '''방송'''국 소속 교향악단(RAI)들을 활발히 지휘했고 그 영상과 음원들이 많이 남아 있다. 또 밀라노 라스칼라와 로마 산타 체칠리아에서도 객원 지휘자로 등장했다. 1960년대초에는 시칠리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역임했다. 첼리비다케의 자택이 시칠리아 Lipari에 있었다. 1960년에는 [[시에나]] 음악원(Accademia Musicale Chigiana)에 입학해 1962년에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또 1960년대 초에는 스페인 '''방송''' 교향악단(RTVE)에도 종종 객원 지휘자로 출연하여 여기서 지휘한 영상과 음원들이 많이 남아 있다. 한동안 좀처럼 이탈리아, 스페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나 1960년대초 코펜하겐 교회에서 봉직하게 되면서 북유럽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1965년 스웨덴 '''방송'''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되었다(1965–1971). 이후 이탈리아에는 발길을 끊었고[* 1967년까지 예정된 스케줄을 소화했다.] 스페인 객원 지휘도 크게 줄였다. 1971년 슈투트가르트 '''방송''' 교향악단에 취임했다(1971–1977). 이를 계기로 서독으로 활동 영역이 옮겨지게 되었다. 또 프랑스 '''방송'''국(Radio France) 소속의 [[프랑스 국립 관현악단]]의 상임지휘자를 역임(1973-1975)했으나 1년여만에 사임하고 말았다. 1970년대 말에는 상임지휘자 교체기에 있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객원지휘자로 초빙되기도 했다. 1979년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이처럼 첼리비다케가 뮌헨 필을 맡기 전에 거의 방송 교향악단들과 일했다는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고, 덕분에 음반 녹음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녹음이 현존하고 있다. 뮌헨 필 역시 바이에른 '''방송'''국(BR)이 모든 연주를 녹음하고 있기 때문에 이점에서 방송 교향악단과 별차이가 없었다. 1996년 프랑스 파리 교외 자택에서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